"집에 있었어요. 집에. 테레비. 봤어요. 테레비. 하루 종일 텔레비 보는 게 일이죠. 뭐, 너무 심심해서요 뛰쳐나가고 싶은데, 엄마가 막아서 못 갔어요.”
영화에 등장하는 노동자 지영씨는 말했다. 맞다. 숱하게 들어왔다. 몸도 안 좋은데 그냥 집에 들어가 있어라, 주변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, 는 저주를 자주 들어왔다. 가만히, 조용히, 얌전히 방구석에 시설 구석에 처박혀 텔레비전나 보며 히히히 거리고 있으라 했다. 지영씨 엄마뿐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장애인들을 막아섰다. 버스, 학교, 열차, 은행, 비행기, 편의점, 식당, 카페 곳곳에 문턱을 세워 장애인들을 턱턱 막아섰다. 장애가 있는 지영씨가 ‘테레비‘ 밖으로 , 현관 문턱 밖으로 나가서 노동한다고 했을 때, 동생은 말했다. “니가?“
(...) 경제적 ‘쓸모‘를 떠받드는 근대경제학은 장애인을 ‘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‘로 규정했다. 그 견고한 역사 속에서 장애인의 노동은 언제나 “니가? 일한다고?“ 라는 반문을 마주해야 했다. 장애인의 노동은 ‘사랑이 가득한 일터‘로 포장된 재활노동(보호작업장)이거나, 시혜적 복지노동(공공노동)이거나, 노예노동(염전, 쓰레기장, 개농장, 양식장)으로 연상되었다. 그런데, <우리는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자입니다> 영화 속 노동자들의 노동은 이게? 이런게? 노동이라고? 질문하게 한다. 맞다. 비장애인들이 겪어온 노동의 긴 목록들 중에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수행하는 노동을 노동이라고 불러본 적 없다. 동네시장에 나가 상인들에게 UN장애인권리협약문을 전달하고, ‘차별 없는 명절 맞으세요‘ 인사하며 평등캠페인을 진행하고, 북치고 노래하며 공연노동을 수행하고, 그림을 그리고 발표하는 일을 두고 “이것도 노동이다”라고 할 때 , 다소 당황할 수 있다. 맞다. 기존 노동을 의아하게 만드는 노동, 노동의 개념에 도전하는 노동, 장애를 둘러싼 사회적 감각의 배치를 이동시키는 노동, 바로 “권리를 생산하는 노동“이다.
(...) 다만, ‘권리와 투쟁‘으로 빚어낸 중증장애인 노동의 가능성을 한 장면, 한 장면 조각모음하듯 배치한다. 극복-재활-보호 노동에서는 등장할 수 없는 권리중심-중증장애인의 노동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한 조각, 한 조각 보여준다.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경험과 느낌들을 조각모음하며 각자의 질문을 조직하게 한다. 복숭아란? 노동이란? 생산이란? 예술이란? 권리란? 어떤 것인가?
(...) “대혁씨는 덧 붙인다. “오세훈 시장은 뭐였지? 오세훈 시장은 건강하게 살아라! 오세훈 시장은 퇴진하라! 투쟁!“ 이제, 온 세상 떠들썩하게 최중증장애인노동자 해고복직투쟁의 풍악이 들리는 듯도 하다. 풍악을 울려라 온 세상 떠들썩하게 “투쟁!“